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동의를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동의는 너무나 중요하고, 또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해방적 욕망의 무게를 전부 지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동의, 즉 섹스에 합의한다는 것이 성적 욕망이나 즐거움, 열정과 등치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나쁜 섹스를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비참하기 짝이 없는 섹스를 너무나 많이 경험한다는 사실은 진정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며, 동의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 앞으로 우리의 섹스가 다시, 혹은 처음으로 좋아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이 주장을 거부하고 다른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동의의 형식을 이리저리 뜯어고치며 거기에 윤리적 부담을 과도하게 쌓거나, 보다 안전한 세계를 만들고 자신들의 쾌락을 더욱 중시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여성들의 시도를 비난하는 대신, 우리는 욕망의 불확실성을 부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는 섹스의 윤리를 정확히 밝혀내야 한다. 성적 윤리라는 이름에 합당한 윤리가 되려면 모호함, 불투명함, 알지 못함을 허용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위험하고 복잡한 다음의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폭력에서 안전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 또 하나의 진단 기준은 '성적 활동에 대한 관심'(욕망이 아님)이 다. 장애진단편람에서 여성은 장애를 겪을 수 있는 성적 욕망이 랄 것이 아예 없는 듯하다. 물론 장애진단편람에 포함되는 것이 해방의 표시는 아니지만, 여성들은 이득과 동기를 가질 때 남성은 욕망을 가지고, 여성이 관심과 흥분에 관한 장애를 가질 때 남 은 욕망 장애를 가진다. 이 의미론적 차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이 섹스에 기울이는 관심은 보다 인지적인 활동으로 여겨지고, 남성의 관심은 더 리비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은 섹스를 고려하지만 남성은 섹스를 원한다. 여성의 성에 대한 관심은 그러니까, 덜 성적이다.

우리는 욕망의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고, 욕망을 활성화하거나 금지하는 맥락과 조건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욕망의 언어를 없애는 것이 도움이 될까? 이것이 그저 이미 문제적인 현상, 즉 여성에게 섹스는 주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가능하여 판단할 문제이지만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근원적 필요로서 온전 히 남아 있다는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하지는 않는가?

🔖 우리는 사실은 사회적인 현상을 섹스의 모델이라고 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즉, 섹스가 남성에게는 본질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가정과 더불어 여성이 마지못해 하는 섹스는 순전히 자신에게 중요한 다른 것을 위한 거래일 뿐이라는 가정은 사회적인 것이다. 섹스를 하면 연결감, 친밀성, 결속감 등 다른 가치 있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효과를 제공할 수 있는 섹스 자체를 배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 다.

서로에게 깊은 즐거움을 주는 행위로서 섹스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 모든 복잡함 속에서도 여성의 성적 쾌락을 포용하고 활성화하며, 남성 욕망의 복잡성 또한 인정 하는 문화를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젠더를 떠나 경이롭고 보편적이며 민주적인 쾌락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을까? 모두를 위한 쾌락주의, 소피 루이스가 말한 "경계를 풀고, 다형적인 실험"을 모두가 추구할 수는 없을까?

모든 섹슈얼리티는 반응적이다. 모든 성적 욕망은 그것을 차츰 형성해가는 문화 안에서 등장한다. 바손의 모델에서 중요한 부분, 즉 관계적이고 창발적인 욕망의 본성에 대한 강조를 남성과 여성의 섹스 충동은 다르다는 수사학에 너무 많이 이용하지 않으면서 수용할 수 있을까?

섹슈얼리티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특정한 맥락들 속에서 살아가고 배우고 발전한다. 이는 섹스가 우리에게 모종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섹스는 결코 순전한 기능이 아니며, 언제나 풍부한 의미가 축적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섹스가 즐겁고 만족스럽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해방적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할 곳은 바로 섹스의 맥락이다.

🔖 여성들은 심지어 보노보 원숭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자극에 성기 반응을 경험하며, 심지어 성적 위협의 자극에도 반응한다. 그것이 이미지이든, 강간 판타지이든, 폭력의 실제 경험이든 모두 가능하다. 여성이 무엇에 흥분하는가에 대한 진실, 더 나아가 그들은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대한 진실을 성기 흥분의 수치를 근거로 성급하게 추론한다고 해서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을 수도 있지만, 몸이란 복잡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할 뿐이다. 육체는 중재인이 아니며, 중재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쾌락에 관심이 있고 열정만큼이나 동의에 관심이 있다면, 주관적인 것이야말로 정확히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우리는 가짜 과학주의의 이름으로 여성의 몸이 하는 일을 물신화하기보다, 그 모든 복잡성 속에서 여성이 말하는 바를 우선시해야 한다.

🔖 우리는 왜 그토록 여성의 욕망에 집착하는가? 먼저 그것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위험을 관리할 책임을 여성에게 다시 새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남성의 행동이 정당한지 판단하려면 여성의 비밀스러운 욕망이 반드시 밝혀져야 만 한다. 여성의 욕망은 남성을 면책시킬 수 있다.

그러나 섹스를 다시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부담은 왜 꼭 여성, 여성의 섹슈얼리티, 즉 우리가 밝혀낸 여성에 대한 진실이 떠안아야 하는가? 왜 여성이, 왜 섹슈얼리티 자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명백하게 집단적인 현상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가? 심지어 그 현상은 남성성의 규범과 밀접하게 얽혀 있지 않은가?

몸이 하는 행동과 여성이 하는 말 사이에 균열이 있다는 의미의 불일치성은, 정확하게도 여성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전제를 암시하기 때문에 강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우리는 여성의 욕망에 대해 그들 스스로가 파악한 지식에 너무나 크게 의지하고 있기에 그 전제는 우려를 자아낸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섹스에서 여성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건이자, 쾌락 및 비폭력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 혼란스러운 비난으로부터 남성을 보호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훌륭하고 적극적인 페미니즘의 조건으로 만들었다. 불일치성은 불편한 사실이다. 여성이 자신의 진정한 육체적 욕망을 모른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알고 그것을 큰소리로 자신 있게 주장하라는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어깨에 윤리적이고 비강압적이며 즐거운 섹스를 짊어진 훌륭한 성적 주체, 이상적인 시민이 될 수 없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역량 강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여성에게 자신의 억압된 욕망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고, 인지하고, 말하라고 요구하면서 우리는 자기 지식을 억압과 대립시키고 자기-투명성을 어둠과 대립시킨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강제적으로 다루게 만드 는 죄를 짓는 셈이다. 성 연구도 이렇게 엄격한 관점을 적용한다.

과학적 지식이 여성의 힘을 기르고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섹스, 즉 흥분되고 즐거우며 비강제적인 섹스를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그러한 위험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우리의 사고에 아주 깊숙이 자리 잡은 나머지,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조직하려 하기에 이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즉,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다고 짐작되는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학대당하지 않기 위해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학대로부터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에게 어떤 학대도 인정하지 않는 섹슈얼리티를 가져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여성을 학대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특정 지식을 물신화하는 경향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들이 풍부하고 흥분되며 즐거운 섹스를 할 수 있게 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는 미지의 대상을 탐구해야만 한다.

🔖 여성의 욕망에 대한 권한은 여성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 주장하고 싶은 유혹 말이다. 그러나 색슈얼리티에 대해서든,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든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신통한 효과가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여성은 자신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달리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감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섹스에 관련해서 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왜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려면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만 한단 말인가?

🔖 거니는 수치심 없이 쾌락을 추구하도록 독려해주는 가정에서 자라난 여성과 초기적 성적 경험의 일부로 자위를 즐기는 여성은 "정확히 자신의 어디를 만져줬으면 좋겠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 라고 썼다. 그러나 그녀는 상황을 과장한다. 우리의 섹슈얼리티는 우리가 혼자서 온전히 발견한 뒤 다른 사람의 섹슈얼리티와 꼭 들어맞게 '궁합을' 맞춰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만지는 방식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나를 만져주길 바라는 방식의 청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자위는 섹스가 아니다. 섹스의 즐거움 중 하나는 정확하게도 예전과 다르고 새로운 애무 방식을 발견하는 것, 즉 미지의 상황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 버사니는 섹스를 유일한 권력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옳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의 몸이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하든 우리 모두는 섹스를 할 때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지고, 우리 모두는 근원적으로 고뇌이자 기쁨인 무력감을 경험하며, 우리 모두는 미숙하고 의존적이 된다. 욕망하는 것, 갈망하는 것은 취약해지는 것, 양분, 접촉, 상대방의 품에 안겨 인식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다. 버사니의 주장처럼, 성적인 것의 위험은 '자아를 상실'하는 위험이다. 차분하고 성숙한 자아의 분열 속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기쁨이자 힘이고 초월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 우리 중 누구도 여성의 욕망이나 욕망에 대한 주장에 충격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대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가볍게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부분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섹스는 무수한 질문, 표현, 탐구의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왜 반드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어야 할까? 왜 남성들이 우리와 함께 탐색해나가기를 기대하면 안 되는 걸까? '좋다'와 '싫다'에만 집착하 는 것은 우리가 이 바다를 항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공간에서야 우리에게 강렬한 쾌락을 건네줄 수 있는 탐험의 과정이 펼쳐질 수 있다. 작가 도더 벨라미는 이를 "서로에 대한 상호적 욕구와 동등한 위험을 가진 두 사람" 간의 과정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섹스를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식과 불가분 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유연하고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받아들인 것을 끊임없이 소화하고 통합하고 재구성한다. 완전한 자율성과 완전한 자기 지식의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 아니라 악몽이기도 하다.

질리언 로즈는 <사랑의 작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영혼은 경계가 완전히 굳어진 사람만큼 미쳐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경계의 주변에서 여전히 취약하고 상처 입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때로 가장 깊은 쾌락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기도 하다.

🔖 여성들은 폭력에 대한 취약성과 쾌락을 경험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복잡한 거래에 대한 인식을 곤두세운 채 살고 있 다. 그리고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폭력, 경직성, 수치심으로 가득 찬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우리 각각은 그것에 반응하며 자신의 복잡하고 고유한 성애를 발전시킨다. 우리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 어떻게 알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왜 원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섹스에서 잠시라도 권력을 빼놓을 수 있다거나, 우리가 불평등이 없는 축복 받은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 는다. 나는 동의가 우리의 모든 상호작용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기적적으로 대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푸코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그것은 이상이고, 그래서 그것은 망상이다. 남녀 사이에서, 우리 모두의 사이에서 권력 불균형에 대한 협상은 시시각각으로 발생한다. 성적이든 아니든, 협상 행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영역은 없다. 섹스에서든, 그 외 다른 무엇에서든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상대의 욕망을 가능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하는 바를 찾아보고, 단순히 그 지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색하는 일은 일생의 과업이며, 계속해서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 기쁨은 그 일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